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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48

국민대와 함께한 성곡동산 24년, 북악인의 안식처로 자리매김

요약

지금은 1만 북악인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성곡동산이 故 성곡 김성곤 선생의 묘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성곡동산은 동산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성곡 선생의 호를 따온 것.

1990년대 초반 성곡동산 전경
1990년대 초반 성곡동산 전경

지금은 1만 북악인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성곡동산이 故 성곡 김성곤 선생의 묘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성곡동산은 동산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성곡 선생의 호를 따온 것. 75년 2월 25일 별세한 당시 쌍용그룹(본교 재단) 회장 故 省谷 김성곤 선생이 본교의 후원(後苑)에 안장되면서 무명의 동산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미망인 故 명원 김미희(당시 본교 재단이사) 여사가 81년 별세, 합장되면서 묘소는 거의 성역화 되었다. 이후 9년간의 꾸준한 이장 계획으로 성곡 선생, 명원 여사의 묘소가 84년 5월 18일 대관령부근으로 이장되면서 동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4년 10월 묘소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동산은 83년 여름 폭우로 인해 한 차례 무너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이장 이후 당시 교내 휴식 공간 부족 문제와 맞물리면서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묘 이장 후 1년 이내에는 그 묘지를 다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한국전통관례와 그린벨트 등 여러 제약에 묶여 성곡동산의 활용계획은 더디어만 갔다. 하지만 그린벨트가 완화됨에 따라 북악인의 의견수렴을 바탕으로 계획안이 구체화되면서 성곡동산은 변모하게 된다. 즉, 작은 공간, 시설 등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북악인의 의견이 동산을 진정한 휴식처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특히, 지난 93년 교상인 용두리가 성곡동산 아래에 위치함으로써 자연의 공간과 학교의 상징물이 어우러진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한여름 시원한 폭포수를 내뿜는 용두리와 시원한 산바람의 성곡동산이 휴식의 장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당시까지만 해도 성곡동산은 야외수업이나 일부 연인들의 전유물이었으나 벤치와 나뭇등걸이가 세워짐으로써 더 많은 학생들을 손짓하였다.

지난 94년에는 성곡동산의 언덕 면에 철쭉을 심어 봄이면 더욱 화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색색별로 심어진 철쭉은 주말에 교정을 찾은 지역민이나 동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며칠 전 모 방송국 촬영 때 교내에서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성곡동산의 화단 앞에서 촬영이 이루어져 전국에 성곡동산의 화려함을 선보였다.

국민대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성곡동산, 성곡동산이 21세기에도 국민대의 명소,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모든 성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최대현 기자보 / ≪국민대신문≫ 2007-12-12

사료 사진

1. 1970년대 후 성곡 묘소, 2. 1980년대 후반 성곡동산 전경, 3. 1990년대 초반 성곡동산 전경
1. 1970년대 후 성곡 묘소, 2. 1980년대 후반 성곡동산 전경, 3. 1990년대 초반 성곡동산 전경
성곡동산 사진
성곡동산 사진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93_2003/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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