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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45

우리학교의 교상, '용두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며

요약

교문을 지나 올라오다 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교상, ‘용두리’이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맞잡고 용솟음치려한다. 이러한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용두리가 그곳에 자리하기까지는 각고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1. 제43회 배호춘계종합체전(1989.5), 2. 백호 북악관 걸개그림, 3. 교상 용드리 체막(1993.6)
1. 제43회 배호춘계종합체전(1989.5), 2. 백호 북악관 걸개그림, 3. 교상 용드리 체막(1993.6)

교문을 지나 올라오다 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교상, ‘용두리’이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맞잡고 용솟음치려한다. 이러한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용두리가 그곳에 자리하기까지는 각고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교상에 대한 첫 논의는 개교 20주년이 되는 1966년 신문사(학보사) 추진사업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여론 조사를 통해 ‘흑마’가 교상으로 결정되어 ‘흑마들의 잔치’라 하여 단합된 구실을 하였지만 확정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교상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1974년도에는 백호, 1977년도에는 거북이, 1981년도에는 학 등이 거론되었으나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미 선정된 교상은 바뀔 수 없다는 절대성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웬만한 동물들은 이미 타대학에서 선점한 상태여서 선택 폭이 좁아 중론을 하나로 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에 1981년 총학생회에서 교상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동물이 아닌 ‘풍차’로 의견을 모았으나 북악의 이미지를 담고 있지 못하다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교상 논의는 계속되어 1983년 대학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교상위원회가 발족하여 쌍용과 반달곰으로 의견을 수렴하였으나,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듯 교상을 정하는데 어려움에 봉착하자, 교상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인 모두가 학교를 상징하는, 대외적 홍보를 위한 교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그만두기도 힘들었다.

이에 1986년 총학생회가 ‘교상건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개교 40주년에 맞춰 국민인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교상을 확정시킨다는 목표아래 사업을 추진하여 백호를 교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0월 축제기간 동안에 북악관에 대형 백호그림이 걸렸을 뿐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전 국민인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교상 건립문제는 1991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교상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총학생회장 선거 입후보자 모두가 이를 정책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92년 6월 국민인의 각 대표자가 참여한 가운데 교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교상건립학생추진위원회가 별도로 신설되면서 교상 건립을 위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재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쌍용이 결정된데, 이어 교상건립추진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이를 확정하였다. 이후 교상 건립사업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교상 디자인과 명칭이 공모되는 한편, 건립기금마련을 위한 전 국민인의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그 결과 개교이래 47년만인 1993년 6월 모든 국민인의 숙원이던 교상, 용두리가 지금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우리 학교의 상징이요 구심체 역할을 할 용두리가 세워진지 10년이 흘렀다. 용의 모든 힘은 여의주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의주를 빼앗기면 모든 힘을 잃게 된다고 한다. 과연 우리 스스로가 여의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문해봐야 할 것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3-10-27

사료 사진

3. 교상 용드리 체막(1993.6)
3. 교상 용드리 체막(19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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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93_2003/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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