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01 · 1946—1958
창성동에서 시작된
국민의 대학
광복 후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인재를 기르기 위해, 해공 신익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세운 최초의 민족사학. 그 시작의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창성동 시대 만나기
ACT 01 · PROLOGUE · 1945—1946
나라를 되찾은 사람들은
대학을 먼저 꿈꾸었다
광복 뒤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염원 속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은 정치와 경제만큼 교육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새 나라를 이끌 인재를 길러낼 대학은 독립운동의 다음 과업이었습니다.
“민족대학의 설립은 곧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임시정부가 세운 ‘국립대학’ 더 읽기 →경교장에서 환국 후 첫 임시정부 국무위원 기념촬영 · 1945. 12
ACT 02 · THE FIRST CLASS · 1946. 09
교실 두 칸에서
민족사학이 시작되다
1946년 9월, 국민대학관은 서울 내수동 보인상업학교의 교실을 빌려 야간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넉넉한 교정도, 온전한 교사도 없었지만 배움의 목적만은 분명했습니다.
법과와 정경과에서 시작된 첫 수업은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최초의 민족사학’이라는 약속을 현실로 옮긴 첫 장면이었습니다.
- 개교
- 1946
- 첫 학과
- 법·정경
- 수업
- 야간
국민대 개교 기념촬영 · 서울 내수동 보인상업학교 교정 · 1947. 2
ACT 03 · A PLACE OF OUR OWN · 1948. 02
마침내 창성동,
그러나 온전한 학교는 아니었다
국민대학은 여러 번의 이전과 시련 끝에 종로구 창성동의 옛 체신요원양성소 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지 1,200평에 목조건물 세 동이 있었지만, 화재와 균열로 실제 쓸 수 있는 교실은 서너 칸뿐이었습니다.
새 보금자리를 얻었지만, 이제 그 공간을 진짜 학교로 만드는 일이 남았습니다.
국민대학의 첫 창성동 교사 · 일제강점기 체신요원양성소 건물
ACT 04 · WE BUILD OUR SCHOOL · 1948—1949
학교가 우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학교를 짓는다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학생들은 기술자를 직접 고용하고 방해에 맞서 공사를 이어갔습니다. 1949년 9월 5일, 마침내 연건평 280평의 목조 2층 교사가 완성되었습니다.
학생과 교직원이 함께 세운 창성동 2층 목조 교사 · 1949
ACT 05 · THE DAY BEFORE · 1950. 06. 24
첫 졸업식이 열린
바로 다음 날
개교 이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첫 학부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학생들은 해공 신익희 학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졸업장을 받아 들고 교수들과 사은회를 마친 뒤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국민대학 제1회 졸업증서 · 경제학과 · 1950. 6. 24
ACT 06 · CLASS IN EXILE · 1950—1953
도시는 무너져도
수업은 멈추지 않았다
서울의 교사는 점령되고 학교 간판마저 ‘인민대학’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민대학은 부산으로 내려가 전시연합대학 위탁수업을 거쳐 월세 교사에서 자치적으로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군에 입대했던 최대의 위기에도, 남은 학생과 교직원은 졸업식을 이어갔습니다. 배움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로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전쟁과 국민대학 더 읽기 →부산 피난 시절 국민대학 제3회 졸업식 · 1952. 3
ACT 07 · RETURN AND ROOTS · 1953—1958
다시 창성동으로,
뿌리는 더 깊어졌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뒤 국민대학은 창성동 본교사로 돌아왔고, 9월 1일부터 다시 서울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전쟁과 재단 문제, 해공의 서거를 지나면서도 학교를 지킨 힘은 구성원들이 공유한 ‘이교위가’의 정신이었습니다.
첫 졸업생들이 심은 플라타너스처럼, 국민대학은 흔들리면서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 뿌리는 1959년 성곡 김성곤의 인수와 함께 새로운 중흥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전시 문안 기준: 개교 80주년 기념식 사진전시 1장 및 국민대학교 사이버역사관 「창학과 창성동 시대개막」.
국민대학 제1회 졸업생들이 심은 플라타너스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