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02 · 1959—1970
다시 세운 학교,
중흥의 문을 열다
1959년 성곡 김성곤이 국민학원을 인수했습니다. 창학의 뜻을 지키는 일은 이제 학교를 다시 세우고, 배움의 일상을 넓히는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중흥의 시대로 들어가기창성동 신축 교사 전경 · 1959
ACT 01 · THE SUCCESSION · 1959
창학의 불씨를
중흥의 책임으로
전쟁과 재단 분규를 견딘 국민대학에는 학교를 안정시키고 다시 성장시킬 책임 있는 주체가 필요했습니다. 1959년 성곡 김성곤이 국민학원을 인수하며 학교 중흥의 새 장이 열렸습니다.
그가 내건 방향은 지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학풍, 인격을 닦는 교육, 그리고 국가·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실천이었습니다. 창학 정신은 계승되었고, 운영의 의지는 더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습니다.
성곡 인수 전후의 기억 더 읽기 →다음 장면 · 첫 약속은 곧 눈앞의 교사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사 신축 낙성 및 개교 13주년 기념식 · 1959. 12
ACT 02 · A SCHOOL REBUILT · 1959. 12
2천여 학생이 기다린
새 교사가 문을 열다
낡고 비좁은 창성동 교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신축 교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강의실과 연구 공간을 갖춘 새 교사는 학교가 다시 일어섰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1959년 12월 낙성식과 개교 13주년 기념식이 함께 열렸습니다.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 구성원들은 불안정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 대학의 다음’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신축 교사 낙성식의 하루 더 읽기 →다음 장면 · 안정된 교정 밖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창성동 신축 교사 전경 · 1959
ACT 03 · DEMOCRACY IN THE STREET · 1960—1961
배움은 거리에서
민주주의가 되었다
1960년 4월, 국민대학 학생들도 부정과 억압에 맞선 시민의 대열에 섰습니다. 교실에서 배운 자유와 책임은 거리에서 행동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법학과 3학년 이청수 학생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듬해 열린 4·19 1주년 행진은 승리의 기념인 동시에, 한 사람의 젊음과 대학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책무를 기억하는 자리였습니다.
4·19혁명과 국민대학교 더 읽기 →다음 장면 · 격동의 거리에서 돌아온 학생들에게도 매일의 캠퍼스는 계속되었습니다.
4·19혁명 1주년 기념 시가행진 · 1961. 4
ACT 04 · A DAY ON CAMPUS · 1960년대
버스가 오고,
하루의 리듬이 생겼다
스쿨버스가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도서관과 구내식당·서점이 교정의 하루를 채웠습니다. 학교의 중흥은 거대한 선언만이 아니라 통학하고 책을 읽고 식사를 나누는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열람실과 시청각 교육실, 졸업여행과 산악부 활동까지. 1960년대 창성동에는 ‘대학생활’이라 부를 수 있는 장면들이 하나씩 쌓였습니다.
다음 장면 · 생활의 리듬 위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국민대학 스쿨버스 · 1960년대
ACT 05 · THE STUDENT VOICE · 1960년대
신문과 축제,
학생의 목소리가 자라다
편집회의를 거친 문장이 인쇄기에서 신문이 되고, 강의실 밖의 생각은 학내 여론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축전과 문학의 밤, 체육대회는 서로 다른 전공의 학생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습니다. 축제는 구경하는 행사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직접 만들고 발언하는 또 하나의 교실이었습니다.
다음 장면 · 그 목소리는 담장을 넘어 더 넓은 사회를 향했습니다.
신문사 편집회의와 인쇄기 · 1960년대
ACT 06 · LEARNING IN ACTION · 1960년대
배운 것을 들고
농촌으로 향하다
방학이 시작되면 학생들은 책과 의약품, 생활 지식을 챙겨 농촌으로 향했습니다. 문맹 퇴치와 위생 교육, 일손 돕기는 ‘배운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대의 대답이었습니다.
실천·실용·실사구시의 교육은 이처럼 현장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대학의 성장은 교정 안의 규모가 아니라 사회와 맺는 관계의 넓이로도 측정되었습니다.
다음 장면 · 그러나 더 커진 공동체를 품기엔 창성동의 공간이 다시 좁아졌습니다.
국민대학 농촌계몽대 발대식 · 1960년대
ACT 07 · THE NEXT GROUND · 1969—1970
창성동을 넘어설
다음 터를 준비하다
학생과 학과가 늘자 창성동은 다시 한계에 닿았습니다. 종합대학을 향한 꿈은 더 넓은 교지와 새로운 교육 시설을 요구했고, 구성원들은 정릉의 북악 자락을 다음 터로 선택했습니다.
1959년의 중흥은 학교를 되살리는 데서 시작해, 1969년 새 캠퍼스의 첫 공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국민대학은 익숙한 창성동을 떠나 두 번째 창학을 시작합니다.
종합대학을 향한 캠페인 더 읽기 →전시 문안 기준: 개교 80주년 사진전시 Illustrator 원고와 국민대학교 사이버역사관 「성곡의 국민학원 인수와 학교 중흥」. 사진 캡션과 연도는 원고 표기를 따랐습니다.
국민대학 신축 교사 공사 가공식 · 196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