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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22

4ㆍ19혁명과 국민대학교

요약

1960년 일어난 4ㆍ19혁명은 독재정권을 국민이 타도한 한국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는데,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학생이었다. 해방 후 최초로 집권한 자유당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재선시키고 그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폐지하더니 급기야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등 비민주적 독재체제를 점점 강화시켜 나갔다.

1. 이청수 열사, 2. 이청수 열사의 묘비(4.19혁명국립묘지 내), 3. 창성동 교사에 내걸린 이청수 열사의 추모 동판, 4. 민주광장 내 세워진 '고 이청수 4·19 민주영령 추모비'
1. 이청수 열사, 2. 이청수 열사의 묘비(4.19혁명국립묘지 내), 3. 창성동 교사에 내걸린 이청수 열사의 추모 동판, 4. 민주광장 내 세워진 '고 이청수 4·19 민주영령 추모비'

1960년 일어난 4ㆍ19혁명은 독재정권을 국민이 타도한 한국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는데,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학생이었다. 해방 후 최초로 집권한 자유당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재선시키고 그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폐지하더니 급기야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등 비민주적 독재체제를 점점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타도와 민주주의의 사수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국민대학교 학생들도 자유당 정권의 비민주적 독재체제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1960년 4월 18일, 수 백 명의 학생들이 캠퍼스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면서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어 4월 19일,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국민대학교 앞을 통과하여 경무대 앞으로 집결하자(당시 국민대학교는 창성동 -전 경무대, 현 청와대에서 매우 가까운 곳- 에 위치하고 있었다), 학교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던 다수의 국민대학교 학생들이 경무대 앞 시위에 합세했다. 바로 이 때 선두에 서있던 당시 상학과 1학년 이청수(李淸洙)가 애석하게도 경찰의 총탄에 맞아 무참히 숨지고 말았다.

고 이청수는 수유리 4ㆍ19국립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그의 높은 뜻과 거룩한 희생을 기려 국민대학교는 1961년 4월 19일, 4ㆍ19혁명 1주년을 맞아 다음과 같은 글을 동판에 새겨 창성동 옛 교사의 2층 계단벽에 부착했다.민주주의의 선봉자인 본교 학생 이청수군은 일천구백육십년사월십구일 꽂다운 청춘으로 희생되었으나 정의를 추구하는 높은 정신은 길이 우리들의 도표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이 건설된 독립국가가 겪는 격동의 역사에서 학생들은 그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문제에 주체적으로 다가서서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는데, 국민대학교 학생들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판은 매년 4ㆍ19혁명 기념일에 북악관 입구에 설치되는 분향대 위에 놓여지고 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1990년 4월 19일 “7000 북악 학우 일동”의 이름으로 북악관 앞 민주광장 왼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고 이청수 4ㆍ19 민주영령추모비”가 세워졌다.

4ㆍ19민주혁명의 정신이 이청수를 매개로 국민대학교 캠퍼스에 면면히 이어져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민주와 통일의 횃불을 치켜올린 故 이청수 선배의 넋을 기리며 노오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에 맺힌 선배 열사의 못다 푼 염원을 안고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의 여명을 밝힐 것을 결의하며 이 추모비를 세운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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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59_1970/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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