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29
제2창학의 보금자리인 정릉동 시대를 열다
요약
국민대학이 창성동 교사에서 정릉동으로 이전한 것은 1971년의 일이었다. 국민대학은 초창기 어렵사리 창성동 교사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으나, 재단분규로 휩싸이며 침체기를 거쳐야 했다.
국민대학이 창성동 교사에서 정릉동으로 이전한 것은 1971년의 일이었다. 국민대학은 초창기 어렵사리 창성동 교사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으나, 재단분규로 휩싸이며 침체기를 거쳐야 했다. 1959년 성곡 김성곤 선생이 국민대학을 인수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갔으나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1961년 박정희 정권 당시 공포된 ‘학교정비기준령’에 의해 국민대학은 협소한 교지와 빈약한 교육여건으로 폐교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국민대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여자초급대학을 병설하고, 1964년 주간부를 부활하며 내실을 다져나갔다. 아울러 종합대학 승격의 걸림돌이었던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설립과 대학설비기준령에 부합하는 교지와 교육설비에 힘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는 한편, 새로운 교지 물색에 힘을 쏟았다. 중앙농민학교를 농과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나, 교지 확보 노력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양재동 말죽거리 일대 100만평을 매입할 계획이었으나, 시내와 너무 떨어져 있어 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예상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곳이 오늘날 정릉동 캠퍼스 부지였다. 원래 이곳은 대한유도회가 1964년 올림픽에서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것을 기념하는 회관을 짓기 위해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은 곳이었다. 이곳은 도심지에서 근거리에 위치하며, 북한산의 자연미를 살릴 수 있는 수려한 주위환경, 장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배후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재단 측은 정부와 유도회 측과 막후접촉을 거쳐, 1965년 159평의 부지를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1968년 2차로 2천7백여 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건축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창성동 교지를 처분하면 해결될 수 있었으나, 당장 학생들의 교육이 중단되어야 하므로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청와대에 인접한 창성동 교사는 건축 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어 거래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재단 측은 정부와 끈질기게 교섭하여 부지 대금 3억 5천만 원을 선금으로 전액 받되, 교지는 정릉동 캠퍼스 건물이 준공되는 1년 6개월 후에 비워준다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1969년 7월 정릉동 부지에 착공의 첫 삽을 뜬 이래 1971년 9월 본부관이 준공되면서 국민대학은 정릉동 시대를 열게 되었다.
요즘 국민대학은 7호관(가칭)과 지하주차장 건설 공사로 부산하기 그지없다. 지하주차장은 지상 녹색캠퍼스와 맞물려 변화할 캠퍼스의 모습을 기대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공사가 끊임없다는 볼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정릉동으로 이전한 이래 30여 년 동안 우리 국민대학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세계 속의 웅비’를 외칠 만큼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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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71_1980/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