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51
건학이념과 육영이념 정립하여 새롭게 도약해야
요약
자부심과 긍지를 갖자
자부심과 긍지를 갖자
국민대학교가 개교한 지 5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아직도 국민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국민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빈곤에서 연유하는 바 클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1일 해공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건국강령에 입각한 교육균등의 원칙 아래 설립된 "국민의 대학", 그리고 미군정의 대학교육 장악정책에 따라 추진된 국대안에 대항하여 건립된 첫 민족대학으로서 국민대학은 탄생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교육은 물론 그러한 사실조차 국민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국민대학에 입학하여 과연 누가 학교를 설립한 해공과 학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키운 성곡에 대해 공식적으로 교육받은 일이 있는가. 왜 세워져 있는지 의미도 모른 채 지나치는 해공의 동상이 고작이고, 성곡에 대해서는 성곡도서관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건학 반세기를 넘긴 지금의 이 시점에서, 그리고 대망의 21세기를 눈 앞에 둔 이 때에 해공의 건학이념과 성곡의 육영이념을 되새겨 본다. 그것도 두 분의 생애사, 즉 삶의 궤적을 통해 추출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전체 국민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하고, 민족 민주 발전과 국민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의 전망을 세워보자.
해공의 생애
해공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성장기 해공은 현실개혁을 지향하던 가전의 학풍인 양명학을 익혔고, 1908년에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조국이 식민지가 된 뒤인 1912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해공은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고 민족의식을 배양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단지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하니, 이 당시 해공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해공은 귀국하여 중동학교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곧 교수직을 버리고 민족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1운동 중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배후 조종한 뒤, 3월 19일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해공은 4월 13일 독립운동의 통할 지도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하였다.
이 때 해공은 임시헌장 기초 심의위원과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이 되어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 정부를 만든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해공은 1920년대 초반 정부 각료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초기 임정의 기틀을 마련하고, 참여 세력의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2년 2월 초 태평양회의와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의 독립 외교운동이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임정을 개편하자는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이 때 해공은 의정원회의에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가능한 빨리 소집할 것을 정부에 건의한 이래 줄곧 그 입장을 견지해 갔다.
그러나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임정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화하더니, 결국 독립운동세력의 대립만 격화시킨 채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해공은 임정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력투쟁을 한중 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섬서성 독군 호경익의 고문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해공은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항일 유격대로서 분용대를 조직한 뒤, 국내 진공작전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해공의 후원자인 호경익이 갑자기 사망하고, 중국 정부 또한 자국의 혁명에 주력하여 한중합작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던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해공은 민족대당을 건설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선도하면서 1932년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해공은 1932년 11월 상해에서 민족협동전선체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 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해공 1933년 말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좌우합작으로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분열되었으므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세력은 두 갈래로 대일 항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1937년 8월 우익단체 중심의 광복전선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 좌익단체 중심의 민족전선 결성이었는데 해공은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같은 분립 상황을 타개하고자 두 계열의 중심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공동으로 발표하여 통합의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8월 27일부터 기강에서 통합회의가 개최되자 해공은 민족전선측 대표로 참석하였지만, 통합을 이루어 내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해공은 민족전선의 무력인 조선의용대가 있던 낙양으로 가서 이들을 지도하였고, 이들이 1941년 봄 연안으로 이동할 즈음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중경에서 해공은 1942년 6월부터 임정의 외교연구위원회, 1943년 4월부터 선전부의 선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4년 5월 임정의 좌우 연립내각 성립 때에는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2일 환국한 해공은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임정의 내무부장으로서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다. 이와 함께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 자주성을 함양하여 갔다.
그리고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당선된 뒤, 초대 국회 부의장·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힘썼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독재화하여 가자 해공은 민주당을 창당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나아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1956년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성곡의 생애
성곡은 1913년 8월 15일 경북 달성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로 이사 와 1928년 달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하였다가 대구고보로 전학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11월 대구고보 4학년 때, 성곡은 일인 교사 배척운동을 주도하여 퇴학당한 경험이 있다. 이로 보아 성곡 또한 일찍부터 항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 시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더욱 악랄해지면서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 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한 1929년 11월에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더욱 상승하던 때였다.
따라서 성곡도 대구고보가 일제의 공립학교라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진 식민지 교육에 대한 민족적 불만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일인 교사 배척운동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곡은 사립 보성고보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1934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보전 재학 시기 성곡은 ‘학교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는’ 인촌 김성수를 보면서 그의 인격과 실력양성론적 사고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
때문에 “나도 장차 이런 육영사업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훗날 국민대학 인수의 한 동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성곡을 사로잡은 것은 이 시기 청년 학생들에게 반일·반제의 이념으로 풍미하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이었다.
그같은 유물론적 사고는 성곡으로 하여금 물적 토대를 중요시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나아가 기업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으로 보인다. 성곡이 해방 직후 사회주의 성향의 경북인민위원회 재정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고초를 겪은 일, 그리고 박헌영의 아들을 맡아 키우고 있던 공산주의자이자 승려인 한산스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일 등이 좋은 예이다. 보전을 졸업한 뒤, 성곡은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영남지방의 신흥기업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조국 광복은 성곡이 기업인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하 일본인이 독점 경영하던 비누제조업이 해방으로 중단되고, 비누 수입조차 허용되지 않아 삼공유지는 큰 호황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곡은 1948년 방직공장인 금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또 6·25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1952년 동양통신사를 창설하고, 1954년 연합신문사를 인수하여 언론사업에도 진출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자유당 공천으로 경북 달성에서 4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나갔다.
다음해인 1959년 성곡은 해공 사후 재단분규에 휩싸여 있던 국민학원을 인수함으로써 국민대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때 성곡은 국민대학 인수 요청을 받고, “해공이 남긴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는데”하면서 쾌락하였고 한다. 이는 평소 해공에 대한 존경심과 반독재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영면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곡은 국민대학 육성을 통한 인재 양성, 1965년 성곡언론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언론인 연수 지원, 1968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학술연구 지원 사업을 벌여 자본의 사회 환원과 교육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여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2년 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의 설립과 확장 사업을 통해 사회 간접자본의 확대와 국가 기간산업의 육성에도 심혈을 쏟았다.
1963년 11월 성곡은 경북 달성·고령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으로도 피선되어 경제개발정책을 국회 차원에서 지원하여 갔다. 특히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71년 10월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당의 살림살이를 챙겼는데, 이들 또한 성곡이 물적 토대를 중시해 온 처신의 결과로 생각된다. 성곡의 뛰어난 점은 그것이 비록 좌절하고 말았지만, 박정희 이후를 준비한 점이다.
1969년 9월 변칙적인 삼선개헌의 국회 통과와 그에 따라 실시된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된 직후부터 그 이후를 준비하여 갔다. 그 때 성곡이 생각한 것은 독재의 가능성이 항존하고 있던 대통령중심제 정부가 아니라 의회중심의 내각책임제 정부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본 것이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의 처리 문제였다. 성곡은 이를 통해 의회가 행정부의 시녀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운영논리를 가진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헌법기관으로 최고 집권자에게 새롭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성곡의 의도는 장기집권욕을 가진 박정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결국 그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성곡은 다시 산업의 현장으로 돌아가 중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을 통한 물적 토대의 확대에 노력하다가 1975년 2월 25일, 6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국민인의 재도약을 위한 제언
우리가 본 해공은 민족 민주운동의 화신으로 평생 그것을 실천하여 온 분이다. 그리고 성곡은 조국과 민족의 물적 토대 확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이러한 점은 국민대학의 50년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해공은 국민대학의 혼이고 성곡은 국민대학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혼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한 육신없이는 꽃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민대학에 대한 두 분의 공적이 많고 적음을 평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건학정신과 육영의 토대를 본받아 그를 더욱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에 국민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고, 자부심과 긍지가 자연스럽게 부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해공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과 당위성을 지닌 국민대 경영자를 가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현승일 총장은 경북고 재학 중,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권이 정·부통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획책하는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던 2·28민주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1964년 6·3운동 당시에는 군사정권이 추진한 굴욕적인 한일외교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적 학생 지도자였다. 그에 대한 성가는 이미 민족 민주운동 선상에서 검증된 바 있고, 또 성곡과는 동향이며 후학으로 그의 토대론을 신봉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현총장 취임 이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국민대의 모습과 교육환경의 개선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해공의 정신과 성곡의 토대 위에서 자기 정체성과 민족 민주의 발전 전망을 가진 진정한 국민인, "국민의 대학"으로서 국민대학이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특집기사 / ≪국민대신문≫ 2007-12-28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93_2003/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