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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12

AI 초안 · 역사 교수 검수 전 국민대학관에서 국민대학으로

AI가 쓴 초안입니다. 역사 교수 검수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날짜·수치·인용은 아래 「출처」에 밝힌 자료를 따라 옮겼지만, 사실 확인과 서술 판단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본문에 [검수 필요] 로 표시된 대목은 출처가 엇갈리거나 확인되지 않은 곳입니다.AI 초안 2026-09-03 · 역사 교수 검수 전

요약

국민대학교의 첫 간판은 '국민대학'이 아니라 '국민대학관'이었고, 그것도 야간부뿐이었다. 개교 2년 만인 1948년 8월, 학교는 이름에서 '관' 한 글자를 떼어 내고 주간부로 전환하며 비로소 정규 대학의 형태를 갖추었다.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1)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1)1946 · 출처 국민대신문 916호 https://media.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9

국민대학교의 첫 간판은 '국민대학'이 아니었다. 1946년 9월 보인상업학교 교실을 빌려 문을 연 학교의 이름은 '국민대학관'이었고, 그것도 야간부뿐이었다. 공식 연혁은 그 해 5월에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김구·김규식을 고문으로,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신익희를 회장으로 하여 발족했고, 9월에 해공 신익희 선생을 설립자로 국민대학관이 개교했다고 적어 두었다. 12월에는 재단법인 국민대학관이 법학과와 정경학과 두 학과로 인가를 받았다. 사이버역사관의 시대 개관은 이 출발을 「중국 대륙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주도로 민족대학 설립운동이 불붙기 시작했고 이러한 시대적 열망 속에서 해공 신익희 등 임시정부 주석단이 주축이 되어 최초의 민족사학으로서 국민대학교를 열었던 것」이라고 서술한다.

'대학'이 아니라 '대학관'이었던 것은 학교의 뜻이 작아서가 아니었다. 미군정이 지배하던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이 구상한 종합대학은 인가를 받지 못했고, 교사(校舍)조차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웠다. 1947년 10월 학교는 중구 남산동 동본원사 건물을 교사로 쓰게 되었고, 그와 함께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의 최범술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국민대신문≫ 916호의 기획취재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는 최범술이 해인사 사찰 재산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을 인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남산 교사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해, 1948년 2월 학교는 종로구 창성동 옛 체신이원양성소 자리로 다시 옮겨 갔다. 개교 이후 1년 반 사이에 교사를 세 번 옮긴 셈이었다.

전환점은 1948년 8월이었다. 공식 연혁은 이 달에 「재단법인 국민대학 허가(이사장 최범술, 학장 신익희)」와 「야간부 폐지, 주간부 전환(법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을 나란히 적어 두었다. 이름에서 '관' 한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밤에만 열리던 교실이 낮으로 옮겨 오고, 두 학과가 세 학과로 늘어난 것이다. 개교 2년 만에 국민대학은 비로소 정규 대학의 형태를 갖추었다. 다만 승격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앞의 916호 기획취재는 1948년 2월에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을 정규대학으로 승격시켰다고 적어, 공식 연혁의 8월과 다르다. [검수 필요]

정규 대학이 된 학교는 곧바로 자기 얼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9월 교표가 제작됐다. 민초를 뜻하는 올리브 잎이 '국민대학'을 떠받드는 모양이었다. 12월에는 『국민대학보』가 창간됐고, 창간호에는 창학의 청사진을 담은 국민대학 건립취지서가 실렸다. 이듬해 8월에는 교가가 만들어졌으며, 9월에는 학생들이 스스로 세운 창성동 목조 2층 교사가 올라갔다. 1950년 6월 24일에는 학부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인가도 교사도 스스로 구해야 했던 학교가 4년 만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재단의 이름은 그 뒤로 한 번 더 바뀐다. 1959년 10월 성곡 김성곤 선생이 인수한 법인의 이름은 '국민학원'이었다. ≪국민대신문≫ 711호의 「설립과 발전」은 이를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 선생이 재단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했다」고 적었다. 국민대학관에서 국민대학으로, 다시 국민학원으로 이어지는 이름의 변천은 학교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겪은 부침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만 재단법인 국민대학이 언제 어떤 절차로 국민학원이 되었는지는 공식 연혁에도, 학보 기사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검수 필요]

사료 사진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2)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2)1946 · 출처 국민대신문 916호 https://media.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9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3)
국민*인,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3)1946 · 출처 국민대신문 916호 https://media.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9
국민*인
국민*인1946 · 출처 국민대신문 916호 https://media.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9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4)
우리학교 역사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획취재 수록 사진 4)1946 · 출처 국민대신문 916호 https://media.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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