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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07

창학 당시 ‘종합대학’의 청사진을 펼친 국민대학

요약

본교가 남다른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바가 되었다. 즉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후 최초로 세워진 민족대학, 해방정국에서 유일하게 「민족론」을 가르쳤던 대학 등이 그것이다.

1. 서울에 국민대학 우선 야간부부터 설치.전문부·예과, 법문학부·정경학부·이공학부·의학부 개설(≪독립신문≫ 1946.5.19.)
1. 서울에 국민대학 우선 야간부부터 설치.전문부·예과, 법문학부·정경학부·이공학부·의학부 개설(≪독립신문≫ 1946.5.19.)

본교가 남다른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바가 되었다. 즉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후 최초로 세워진 민족대학, 해방정국에서 유일하게 「민족론」을 가르쳤던 대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하나 더 추가할 것은 해방 후 최초로 '종합대학'을 구상하고 건학운동을 벌여 갔던 점이다.

미군정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종합대학'을 표방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국민대학건립취지서'에 밝히듯이, 본교는 "법문계통"은 물론이고 "자연과학", 그리고 국민의 정신방면에 기여할 "종교학", "예과"와 "의학부" 등을 포괄한 종합대학의 설립을 목표했다. 해방 당시 한국에는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는 몇 개의 전문학교만이 설립된 상태였다. 이들 전문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4년제 대학 승격에 힘을 쏟았지만, 종합대학의 구상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사실 일반 사학(私學)에서 종합대학을 구상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본교가 창학의 청사진을 '종합대학'으로 표방한 것이다.

이무렵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기존의 전문학교를 묶어 소위 국립서울대학설립안을 발표하며 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해 갔다. 그러나 미군정의 국립대학안은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말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그것은 미군정의 '국립'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국립'은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의 뜻있는 지성은 국립대학설립안에 반대하였으니, '국대안 파동'이 그것이다.

본교의 '국민'은 당시 '국립'이 세워질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합성한 용어였으며, 종합대학의 구상 역시 '국대안 파동'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지배하는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종합대학의 건학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 인가는 물론 교사도 허가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본교는 종합대학의 큰 뜻을 일단 접고, 법률·정경학과만으로 출범했던 것이다.

본교는 개교한지 35년 만인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비로소 창학 당시의 숙원을 풀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12개 대학, 33개 학부·학과에 학생 수만도 1만 3천여 명에 달하는 대형대학으로 성장하여 명실공이 21세기 명문으로 힘차게 웅비하고 있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3-03-03

사료 사진

2. 국민대학 건립취지서(≪국민대학학보≫ 창간호(1948.12.18.)
2. 국민대학 건립취지서(≪국민대학학보≫ 창간호(1948.12.18.)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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