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06
창학의 뿌리가 같은 경남대학교
요약
경남의 지방 명문으로 발돋움한 경남대학교의 뿌리가 국민대학교에서 갈라져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국민대학의 교사(校史)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경남대50년사』에는 제1장을 「국민대학 시절」(1946~1952)로 시작하여, 경남대학이 국민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경남의 지방 명문으로 발돋움한 경남대학교의 뿌리가 국민대학교에서 갈라져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국민대학의 교사(校史)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경남대50년사』에는 제1장을 「국민대학 시절」(1946~1952)로 시작하여, 경남대학이 국민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경남대의 건학 역사는 해공 신익희 선생에 의해 1946년 9월 1일로 개교한 본교의 창학사와 하나도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양교의 역사는 1952년 최범술(崔凡述) 재단이 국민대학에서 손을 떼고 해인대학을 별도로 세우기까지 7년여 동안 일치하고 있다. 경남대와 본교의 이 같은 관계는 창학 초기 재단 분규에서 배태되었다. 본교는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건립되었으나, 재단을 유치하지 못하여 창학 직후부터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때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던 최범술이 해인사의 사찰 재산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1947년 10월 국민대학의 재단을 맡았다.
최범술 재단의 출범 직후 본교는 남산동 동본원사를 거쳐 1948년 2월에는 창성동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정규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초 최범술 재단이 약속했던 재정적 뒷받침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기부하겠다던 해인사 재산이 해인사 산문회(山門會)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서 최범술 재단은 1948년 10월 신익희 학장을 해임시키며 학교 운영을 독단적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에 교직원·학생은 부실 재단의 축출을 결의하고 본교를 자치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결국 물러난 최범술 재단은 1952년 또 다른 대학을 세워 나갔으니, 해인사 경내에 세웠던 해인대학이 그것이다. 해인대학은 그 후 진주로 교사를 옮겼다가, 1956년에는 다시 경남 마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그런데 이때에도 최범술이 재단에 내놓기로 한 해인사 재산이 산문회(山門會)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자 해인대학 역시 재단 분규에 휩싸이게 되었다. 해인대학은 재단이 교체면서 1961년 마산대학으로 바뀌었으며, 마산대학은 한때 2년제인 마산실업초급대학으로 전환되었으나 1964년 4년제로 복귀되었고, 1971년 경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니 경남대의 입장에서는 최범술 재단을 매개로 국민대와 연결된 초창기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건학의 역사로 볼 때, 양교는 '형제' 내지 '큰집'과 '작은집'의 관계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양교는 5, 60년대의 역경을 거쳐 훌륭하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뿌리에서 출발한 본교와 경남대가 앞으로 역사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유대를 돈독히 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2-02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