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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09

창성동 시절 학생건축위원회

요약

요즘 우리학교는 캠퍼스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대운동장을 뒤집으며 대역사(大役事)에 착수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필자가 학부에 다닐 때에는 이 같은 공사가 이뤄지리라고는 사실 꿈도 꾸지 못하였다.

신축교사낙성식 기념촬영(1949.10)
신축교사낙성식 기념촬영(1949.10)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

요즘 우리학교는 캠퍼스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대운동장을 뒤집으며 대역사(大役事)에 착수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필자가 학부에 다닐 때에는 이 같은 공사가 이뤄지리라고는 사실 꿈도 꾸지 못하였다. 본부관과 북악관, 공학관 정도가 북한산 줄기에 썰렁하게 서있었던 그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학교의 역사는 크게 창성동 시절과 정릉동 시대로 나누어진다. 내수동의 보인상고 건물을 빌려 창학했던 우리학교는 어렵게 남산 동본원사 자리를 교사(校舍)로 얻을 수 있었으나, 미군정의 훼방으로 쫓겨나는 등 시련을 겪다가, 1948년 2월 10일 구 체신이원양성소를 새 교사로 이전하면서 창성동 시절을 열었다.

창성동 교사는 대지 1,200평에 400여 평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은 본관 1동과 측면에 2층짜리 일본식 목조건물 2동 등 3동의 목조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건물의 일부가 불타버리고 3, 4개 정도의 교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반파된 건물은 균열이 심하여 비가 새는 등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최범술 재단은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이에 보다 못한 학생들은 교수들의 동의와 협조아래 부당한 재단을 배제하고, 자치적으로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렇게 하여 1948년 10월에 생긴 것이 학생건축위원회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믿고 공사를 담당할 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건축위원회는 그런 상황에서 목수 등 기술자를 일당 일꾼으로 고용하며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를 반대한 재단은 공사를 끊임없이 방해하였고, 심지어는 깡패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이에 맞서 투석전까기 전개하며 학교를 지켜 나갔다. 학생들의 열성으로 공사 기간은 오히려 단축되어 1949년 9월 5일 연건평 280평의 목조 2층 교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교위가(以校爲家)’의 정신아래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교사 건립의 역사를 이룩한 창성동 교사는 1971년 정릉동으로 이전하기까지 22년간 본교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요즘 근래 행정 수도 이전 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창성동 구 교사를 사용하는 행정자치부도 이전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때 ‘창성동 구 교사 되찾기’ 운동을 거교적으로 벌일 것을 제안해 본다. 그것은 역사 복원 뿐 아니라, 캠퍼스의 부족한 공간 문제 해결, 본교의 위상 제고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신문≫ 2003-04-14

사료 사진

국민대의 첫 교사, 일제강점기 당시 체신이원양성소 건물
국민대의 첫 교사, 일제강점기 당시 체신이원양성소 건물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
3. 창성동 2층 목조교사
3. 창성동 2층 목조교사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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