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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27

창성동에서 정릉동으로

요약

국민대학교가 현재의 정릉동 캠퍼스에 둥지를 튼 것은 약 30년 전인 1971년 9월의 일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확고한 재단 없이 개교한 국민대학교는 마땅한 교사를 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48년 2월 종로구 창성동에 식민지 시대의 체신이원양성소 건물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어렵게 정착하게 되었다.

1. 창성동 캠퍼스 전경, 2. 1972학년도 신입생 환영식 장면(1972.3)
1. 창성동 캠퍼스 전경, 2. 1972학년도 신입생 환영식 장면(1972.3)

국민대학교가 현재의 정릉동 캠퍼스에 둥지를 튼 것은 약 30년 전인 1971년 9월의 일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확고한 재단 없이 개교한 국민대학교는 마땅한 교사를 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48년 2월 종로구 창성동에 식민지 시대의 체신이원양성소 건물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어렵게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창성동 캠퍼스는 신 교사를 준공, 증축하는 등 1,200여 평의 교지에 2,000여 평의 교사를 갖게 되었지만,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꿈꾸며 본격적인 발전을 꾀하는 데는 그 규모가 너무 협소하고 학교 위치 또한 적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날로 팽창하는 학생 수에 비해 공간이 너무 좁았고, 학교 주변이 모두 주택가이며 바로 앞이 중앙청의 후원인 경복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지를 확장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합대학 승격과 도약을 위한 학교발전계획은 캠퍼스 이전 사업에 의해 구체화된다. 학교법인은 수년간에 걸쳐 새 캠퍼스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은 교지 선정 요건을 정하였다. 즉 ① 거리는 도심지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하며, ② 주위의 환경은 자연미를 살려 꾸밀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③ 면적은 장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넓은 곳이어야 한다, 는 것이었는데, 이에 적합한 장소로 현재의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는 정릉동 일대가 낙점된 것이다.현재의 상황에서 이들 요건의 적실성 여부를 생각해 보면, ①은 회의, ②는 만족, ③은 불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①의 경우 거리는 중심에서 가까우나 교통이 편리하지 못한 데에 있으며, ②는 수려한 자연 친화적 환경을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기에, ③은 그린벨트에 묶여 개발이 제한받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편,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1965년부터 교지 매입에 나서 1968년 6월 제1호관(현 본부관) 교사를 기공하여, 2년 3여 개월만인 1971년 9월 총 1,501평의 철근 콘크리트 5층의 현대식 건물을 준공하였다. 또한 같은 날 당시로선 초고층인 15층의 제2호관(현 북악관)을 기공했다. 이어 1971년 9월 초순 창성동에서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함으로써 역사적인 정릉동 캠퍼스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23년 동안 갖은 시련과 수난을 극복하며 성장해 온 국민대학교는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안고 북악 기슭에 옮겨와 그를 하나 둘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학보≫ 2003-01-01

사료 사진

3. 1970년대 초 국민대 정릉동 캠퍼스 전경
3. 1970년대 초 국민대 정릉동 캠퍼스 전경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71_1980/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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