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34
두 가지 풍경과 오해
요약
편집장의 추억담
편집장의 추억담
학생편집장으로부터 창간 60주년 기념호 원고 청탁을 받고 확인해보니 주간교수직을 맡은 것이 17년 전이다. 세월의 빠름에 내심 놀랐다. 1991년 1월부터 1993년 8월까지 주간교수직을 맡았다. 나뿐만 아니라 주간교수 누구나가 겪었던 당시의 일상과 고뇌를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꺼이 청탁에 응했다.
두 가지 풍경
하나, 토요일 저녁마다 신문발간을 위해 들려야 하는, 을지로 3가의 학보사 인쇄소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때의 무거운 마음을 느끼게 된다. 당시 주간교수에게 주말 가족과의 단란함을 기대하는 일은 사치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원고를 최종적으로 다듬어 실제 신문 크기의 대장에 옮겨 조판이 끝나면 주간교수의 OK 사인을 받아 학보가 발간된다. 자정이 넘어도 대장은 넘어오지 않는다. 썰렁한 인쇄소의 유일한 말벗으로 동고동락하던 당시 학보사 장상수 간사(현 교무팀 차장)에게 살짝 기자들의 작업장에 들려 동정을 캐묻게 한다. 그런데 아직도 기사를 작성중이란다. 젠장, 이럴 수가. 언제부터 준비한 기사가 아직까지도 작성중이란 말인가?
매주 목요일 주간교수는 학생편집장과 다음 신문 각 면 기사의 제목과 줄거리를 확정한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제목과 줄거리를 적당히 하여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기자들과의 실랑이가 이제 토요일을 넘기고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은 원고를 움켜쥐고 주간교수가 지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끈다. 우여곡절 끝에 대장에 사인을 하면 새벽 2시가 훌쩍 넘는다.
또 다른 하나, 수업과 관계없이 학보가 배포되는 월요일 아침이면 학교에 나와 불안한 마음으로 총장실의 전화를 기다린다. 총장실에 전달된 학보는 총장님이 마지막으로 OK를 해야 배포된다. 때로는 총장실에서 주간교수를 부른다. 왜 이런 기사와 사진을 싣느냐는 등 주문과 질책이 한 둘이 아니다. 주말, 인쇄소에서 기자들을 달래고 윽박질러 학보 만들던 수고를 누가 알아주랴. 총장실을 나서면서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으나 하소연 할 곳도 없다. 홧김에 사표를 던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당시 총장실 이영옥 비서(현 법인비서실 부장)가 팔을 붙잡으면서 참으라고 달래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당시를 떠올리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주간교수의 일상적인 풍경들이다. 왜 이러한 풍경이 당시에는 일상적이었을까? 지금은 학보 애독자 명부에서 사라졌다고 믿고 있지만, 안기부와 경찰 교육부 학사 담당관은 누구보다도 우리 학보를 하단의 광고면까지 샅샅이 애독해주던 귀한(?) 고객들이었다. 고객이 왕이라지 않는가? 고객의 지대한 관심(?)과 눈에 보이지 않은 주문이 두 가지 풍경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를 탓하랴. 그야말로 시절을 탓할 수밖에 없으리라. 1987년 6월 항쟁으로 당시 우리 사회 전반이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고, 이를 기화로 당시 대학신문이 학내 민주화의 주요한 소통수단의 역할을 했다. 특히 대학생들의 분신과 같은 희생이 뒤따르면서 학보에 대한 감시는 오히려 강화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학내외 이슈를 선점하여 학내 여론을 주도하는 것이 대학신문의 정도라면, 1980년 후반과 1990년대 전반기는 대학신문의 황금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두 가지 오해
이러다 보니 당시 우리 대학은 물론 각 대학에서 6개월짜리나 그 미만의 주간교수가 자의반 타의반 속출하던 때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 엄혹하던 시절 주간교수로서 2년 8개월을 생존했으니 크게 장수(?)를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오해를 받았다.
하나, 학생 기자들은 대체로 당시 주간교수를 권력기관에서 파견된 하수인 정도로 바라본다. 되도록이면 기사를 늦게까지 가지고 있다가 마지막에야 주간교수에게 보인다. 기사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 하려는 의도에서다. 기사 내용과 관계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기사 제목을 뽑으려 한다. 눈치싸움과 기싸움으로 주간교수와 기자 사이에 따뜻한 정은 찾을 수 없다. 인쇄소에는 다른 대학신문도 작업을 했는데, 주간교수가 화를 내어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가버리는 사태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 때 차라리 나도 자리를 박차고 6개월짜리 주간교수가 되는 것이 기자들에게나 나 자신에게 훨씬 더 떳떳할지도 모르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또 다른 하나, 대학 본부는 본부대로 주간교수에 대한 불만이 여간 아니다. 여과 없이 표현하자면 주간교수가 학생기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대학신문이 학생운동의 선전물(당시 표현으로 ‘프로파간다’라고 함)이 되었다고 질타한다. 대학신문의 품위가 크게 타락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주간교수의 소신과 분별없는 처신 때문이란다. 안팎곱사등이라는 말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젊은 교수라 주눅이 들어 당시에는 할 말 하지 못하고 속을 썩다 주간교수로서 2년을 훌쩍 넘겼다.
주간교수직을 그만두고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때의 홀가분함이야 누가 아랴. 그것은 달리 학보사와는 이제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다. 주간교수를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곁눈질하던 기자들이 졸업 후 주례를 청탁하기도 하고, 가끔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는다. 가슴 속에 쌓였던 두 가지 오해는 이로 인해 어느 사이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 학교에 있는 한 이제 전직 주간교수라는 딱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끈질긴 인연의 징표로 남게 되었다.
지금의 주간교수와 기자들에게 내가 겪은 두 가지의 풍경과 오해는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나, 또 다른 그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면, 맡은 일에 대해 사심 없이 최선을 다 하다보면 언젠가 오해는 사라지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것은 지금의 여러분에게도 통할 수 있는 덕목이라 생각한다.
1991년 연말 학보사 축쇄판 창간호를 내고 겸하여 창간 43주년 기념 자축연을 했는데, 손님이 모두 우리 식구뿐이라서 정말 멋쩍고 당황스러웠던 일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한다. 국민대 학보사를 거쳐 간 수많은 주간교수와 학생기자의 땀과 열정이 어우러져 60번째 생일을 맞이한 우리 국민대학교 학보사에 대해 대견함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올린다.
박종기(국사)교수 / ≪국민대신문≫ 2008-11-24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81_1992/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