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38
학보창간(學報創刊) 37주년을
요약
본보(本報)가 원래 창간호를 펴낸 날짜는 37년전,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당시 물자가 귀하여 난로마저 땔 수 없었던 엄동설한에 학보(學報)를 탄생시킨 것은 기어이 해를 넘기기 전에 창간(創刊)을 하고 말겠다는 창간주역(創刊主役)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본보(本報)가 원래 창간호를 펴낸 날짜는 37년전,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당시 물자가 귀하여 난로마저 땔 수 없었던 엄동설한에 학보(學報)를 탄생시킨 것은 기어이 해를 넘기기 전에 창간(創刊)을 하고 말겠다는 창간주역(創刊主役)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1948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대학교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해였다. 2년전인 1946년 3월에 교사(校舍)도 없이 오로지 교육과 면학을 통해 건학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민족의 지도자들과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에 불탔던 청년들이 합심단결(合心團結)하여 만들어낸 것이 우리 국민대학교 창조의 서단(序端)이었다. 내수동(內需洞)의 구(舊) 보인상업고등학교 한 귀퉁이를 빌어 우선 법 ㆍ 경량과(經兩科)만으로 야간부로서 개교를 단행했던 이들은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교사(校舍)를 지어 창성동(昌成洞)으로 옮긴 것이 1948년 그해였고, 곧이어 주간(晝間)대학으로 체제를 바꾸어 좋았다. 이들이 신교사(新校舍)에서 환희의 자축연(自祝宴)을 여는 자리에서 맨 먼저 논의된 것이 학내언론(學內言論)의 창건(創建)이었고, 이에 따라 3개월의 산고(産苦)끝에 4면(面)타블로이드판(版)이었으나, 우리는 창간호(創刊號)속에 담긴 고매(高邁)한 정신(精神)과 순정(純正)한 포부를 지금도 읽을 수 있다. 아니 창간선배(創刊先輩)들의 이상과 의지와 겸허(謙虛)앞에 머리가 숙여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지 않을 수 없는 경건함을 느낀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 학보의 역사는 이 민족의 고난과 대학의 고뇌(苦惱)를 대변하는 증인(證人)이었다. 6 ㆍ 25동란이 터지자 학보는 3호(號)를 내고는 9년간이나 중단되었다. 1960년 4 ㆍ 19직전에 나온 학보는 『정치인들아 정신 좀 차려라! 폭력이 마구 지성을 때려눕히고, 신문사를 두들겨 부슨 불한당들을 비호한 정치인들아, 윤리를 알고, 전만과 판단을 할 줄 아는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좀 되어 달라』고 당시의 비리(非理)를 통열히 비한하는 필봉을 들었다. 5 ㆍ 16이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계엄령(戒嚴令)아래서 발간된 학보들에는 <전면검열필(全面檢閱畢)>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송두리 억압의 아팠던 상처의 자국을 보여주고 있다.
고난 속에서 만나는 창조와 건설의 몸부림은 지금의 우리 학보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조국과 민주를 사랑하는 대학인의 대변지로서 학보는 오늘날 대학의 고뇌를 편견없이 진정으로 반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회에는 입법회의(立法會議)에서 졸속적으로 만들어진 언론기본법(言論基本法)이 있고 언론의 자율이 제한되는 풍토속에서 학보라고 해서 이 고통으로부터 예외일 순 없다.
금압자(禁壓者)는 금압이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금압만이 고통이 아니다. 금압의 논리는 반항자(反抗者)와 반업자(反業者)는 자기들만이 타당하나고 또한 주장한다. 이같은 양쪽의 창날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의 대학언론의 위치w는 이 가운데서도 사리분별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때로는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쓸쓸함이 있고, 때로는 모두로부터 경원시되는 문둥이의 신세가 될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쓸쓸하기 위해 경원시되기 위해 쌔워왔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대학언론의 정도(正道)를 걷기 위해 우리의 자세를 흩트리지 말아야지. 정의롭고,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지성과 이성과 인의도덕(人義道德)을 저버리지 않는 의연함을 지켜가야지. 그래서 순정(純正)한 창조와 건설의 유업을 계승해야지.
사설 / ≪국민대학보≫ 1985-06-24
사료 사진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81_1992/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