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59
시각디자인학과 출신 판사를 만나다
요약
만화가의 꿈을 품었던 시절, 그리고 흔들렸던 꿈
만화가의 꿈을 품었던 시절, 그리고 흔들렸던 꿈
어려서부터 그림과 소설을 무척 좋아해, 화가나 소설가를 꿈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화책을 접하게 됐는데, 글과 그림을 한 지면에 나타낼 수 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로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3년 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림은 혼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실업계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한편 그 시기에 감명 깊게 봤던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어린 마음에 외고에 진학하면 영화에 등장했던 한 장면처럼, 철학에 대해 논하고 토론하는 교육의 장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시험 몇 달을 앞두고 영어 문제집 몇 권을 풀며 외고 입시를 준비했고,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제 이력을 보고는 제가 엄청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해가 있어요.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서울대 입학을 위해 외고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외고 입시 경쟁률이 낮았었죠.” 하지만 막상 외고에 입학하고 보니 ‘죽은 시인의 사회’는 웬걸. 대학 입시 경쟁이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방황했었던 것 같아요. 눈앞에 닥쳤던 상황이 내가 꿈꿨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그림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고, 고2가 된 후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바꿨어요.”
그녀는 대학에 원서를 낼 당시 예술대와 조형대의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했었고, 따라서 미술학원에서 권유해준 대로 시각디자인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렇게 2001년, 그녀는 우리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을 떠올렸을 때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단 하나. 야간작업, 일명 ‘야작’이었다. “저는 대학생 시절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밤을 새거나, 학교 근처 친구 집에서 잠을 자거나. 같이 밤새는 친구들과 야식 시켜먹고, 동트는 걸 보면서 귀가해 씻고 쪽잠자고 다시 등교하는.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아요. 열정적이다가도 고달프고, 행복했다가도 다시 힘들고. 전형적인 20대 대학생이었죠.”
그러나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던 해, 존경했던 만화가 몇 분이 급작스럽게 절필선언을 했고, 그녀는 이를 계기로 만화가의 꿈을 접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가로 생존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그녀는 전공이었던 디자인에 더 매진하기로 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학교를 휴학하고 제일기획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보기도 했다.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인사가 내정됐던 디자인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 성격상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24시간이고 몰두해서 집중을 하는 편인데, 디자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죠. 방학기간 2달 동안은 디자인을 쳐다도 보지 않았어요. 또 제가 작업을 하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 대해서 남들은 비판하고, 제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작업들에 대해서 남들은 칭찬했을 때 확실히 깨달았죠. 디자인은 내 길이 아니구나.”
법을 전혀 몰랐던 디자인학과 졸업생,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고심 끝에 졸업 후 디자인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예체능계에 있던 사람이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삼성에 원서를 내보기도 했으나 2차 면접전형에서 탈락했다. 앞이 캄캄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법대를 졸업했던 아버지가 권유했다. “너는 속독과 속필 능력이 뛰어나니, 사법시험을 보는 것은 어떠니.” 단지 그 뿐이었다. 그녀는 그 길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는 원래 헌법만 있는 줄 알았어요. 1조부터 한 1000조 정도까지? 하나의 법전에 모든 것이 다 적혀있는 줄 알았죠.” 법에 대해 무지했던 그녀였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법에 빠져들었다. “원래 철학을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철학은 현실과 약간 유리되는 측면이 있거든요. 하지만 법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 하에 만든 규칙이에요. 하늘이 내린 진리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그 규칙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거고, 그로 말미암아 현실 속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요. 철학 속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의 실현과는 다른.” 법을 통해 억압 받는 다기 보다 나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러한 법들에 의해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 그러한 법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법에 점점 매료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사법시험을 준비한 지 1년이 흐른 후, 첫 1차 시험을 치렀다. 선택과목으로 국제법을 선택했고, 이 선택과목은 필수과목이었던 헌법과 같이 1교시에 치러졌다. 그런데 시험 도중 문제 하나에 마킹 실수를 해 답안지를 교체했다. 교체한 후 시간 분배에 착오가 생겼고, 시험 종료 3분을 남겨두고 헌법과 국제법 어느 과목도 답안지 마킹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남은 시간 동안 헌법을 마킹했죠. 국제법은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요. 다음 2, 3교시 시험을 엉엉 울면서 치렀죠.” 결국 필수과목 3과목은 합격점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과목이 0점이 나오는 바람에 그 해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슬럼프로 이어졌다. 불합격한 이유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불현듯 시험을 다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가 되든 안 되든 독서실 책상머리에 시간을 정해놓고 앉아있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 해 있는 2차 시험까지는 약 4개월의 기간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1차 시험과는 달리 2차 시험에서는 4과목이나 추가된 데다가, 논술형의 시험이라 그 부담은 매우 컸다. “정답만을 쓰겠다기보다 적어도 답안지는 다 채우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공부했어요. 학원에서는 판례를 외우라고 했지만, 시간은 적고 과목은 많고. 불가능했죠. 그래서 저는 문제를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안 중 왜 하필 이 문제를 출제했나. 이 문제에서의 쟁점은 무엇인가. 왜 모범답안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고 있나. 이와 유사한 문제에 있어서 판례의 태도는 어떠한가. 판례비교분석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나중에는 문제 해결에 대한 응용력이 생겼고, 결국 시험을 치를 때도 이 응용력이 빛을 발했어요. 실제 시험에서는 3문제 정도나 제가 공부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출제됐지만 응용력을 발휘해 답안을 작성했거든요.” 그녀는 결국 그 해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한지 3년 차 되던 해였다.
합격자가 된 그녀는 사법시험 합격생들이 한데 모여 실무 교육을 받는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저는 같은 시험을 치는 수험생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제쳐야 한다’라는 상대적인 기준보다는 ‘아는 것은 절대 틀리지 말자’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시험을 치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더라고요.” 그녀의 오픈 마인드 덕이었을까. 그녀는 연수원 졸업 당시, 10등 안에 들어야만 받을 수 있는 ‘사법연수원 상’을 받았다. 또한 사법연수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법관에 임용됐다.
그녀, 법관이 되다
“판례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좋았어요. 사익은 별개로 두고 오로지 공익만을 고민해도 되는, 어떤 결론이 올바른 결론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전부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어요.” 그녀는 올해 법관 3년 차로, 지난 2년은 서울 중앙지방법원 민사부 판사로 올해는 서울 남부지방법원 형사부 판사로 근무 중이다. “판결을 통해 규범력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측면을 더 고려해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하게 돼요. ‘나에게는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고민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꿈을 꾸기도 하지요. 이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참 보람되고 항상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녀가 법관이 돼 작성했던 판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이 2개 있었다. 하나는 ‘이천창고 화재사건’으로, 일용직 인부들이 창고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붙은 지 1~2분 만에 창고가 전소돼버린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는 보통 창고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낸 사람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게 했고,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달랐어요. 불이 붙은 후 삽시간에 전소 돼버린 상황이라, 혹시 창고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나 의심이 들었죠.” 실제 조사해 보니, 창고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창고를 관리하는 소유주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무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책임을 공평하게 분배했죠.”
나머지 하나는 ‘버스차고지 방화사건’이었다. 버스회사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한 버스기사가 차고지에 불을 질러 버스 38대를 불태워버린 사건이었다. “범죄 자체는 죄질이 매우 나빴죠. 하지만 부당해고를 받은 후 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요청했던 과정, 노동위원회가 버스기사의 손을 들어줬음에도 버스회사가 이의제기를 해 재심에 회부됐던 과정, 퇴직금 지급의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했던 과정 등을 참작해 양형을 했고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형량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었죠.” 앞으로 더 많은 재판을 하고, 더 많은 선고를 내릴 그녀. 그녀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진정성 있는 법관이 되기를 꿈꾼다. “재판의 의미, 판사의 역할, 법치주의의 실현, 규범의 정립과 당사자들의 만족 등의 문제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판사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대학생 때는 얼마든지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꿨을 때의 책임과 손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며 “그러니 그러한 전향이 진지한 고민을 통해 도출된 것이라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타인의 기준에 따른 성공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대학시절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달리는 순간들로 채워 넣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후배를 향한 격려의 눈빛이 묻어났다.
글 / 김지은 기자 사진/ 장유경 수습기자 / ≪국민대신문≫ 2013-06-07
사료 사진
원문 보기 — 이 서술의 근거
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