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80장면 004
한국전쟁과 국민대학
요약
무수한 인명을 앗아가며 한반도를 피폐시킨 한국전쟁은, 세계를 냉전체제로 그리고 한반도를 분단구조로 고착화시키며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국민대학교 역사에도 많은 물너울을 일으켰다.
무수한 인명을 앗아가며 한반도를 피폐시킨 한국전쟁은, 세계를 냉전체제로 그리고 한반도를 분단구조로 고착화시키며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국민대학교 역사에도 많은 물너울을 일으켰다. 전쟁 발발 전야인 6월 24일은 국민대학교 역사에서 매우 뜻 깊은 날이었다. 개교 이후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학부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된 것이다. 특히 학생들이 당시 재단에 의해 해임된 해공 신익희 학장의 자필 서명 졸업장의 수여를 요구하다가 일정이 늦어진 졸업식이었다.
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신익희 학장 및 교수들을 모시고 사은회를 가진 후 헤어졌는데 바로 그 다음 날인 25일 일요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26일 월요일에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27일에는 북한 비행기가 서울 상공을 나는 등 사태가 더욱 급박해지자 국민대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전쟁의 참화는 교육의 전당도 결코 예외로 하지 않았다.
6월 28일, 전쟁 개시 불과 3일 만에 북한군 탱크가 중앙청 광장에 진입했다. 인민군이 학교를 점령하고 학교에 있던 교직원 및 학생 12명을 철사 줄로 포박하여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이어 그들은 책임자를 파견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이 때 「국민대학」이라는 간판을 떼어내고 「인민대학」으로 학교명을 바꾸어 간판을 새로 달았다. 「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의 건설을 꿈꾸는 그들에게 새로운 근대「국민」국가 건설의 열망을 담은 「국민」은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교명에는 바로 이같이 창학의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9월 29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신익희 학장을 비롯해 피난에서 돌아온 교직원과 학생들이 등교하여 약 3개월간 정상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후퇴하자 국민대학교도 휴교한 채 부산으로 내려가 51년 2월부터 전시연합대학에서 위탁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전선이 안정되면서 51년 4월 월세로 건물을 빌려 자치적으로 수업을 진행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군에 입대하고 소수의 학생만이 후방요원으로 남아 있어 개교 이래 국민대학교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1951년 5월 마침내 학생들의 강제입대조치가 완화되고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진학의 문이 열리면서 국민대학교는 정상궤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1953년 3월 제4회 졸업식에 이어 4월에는 단독교사를 마련하였다. 이어 같은 해 7월 휴전협정 체결 후 창성동 본교사로 돌아와 9월 1일 제2학기 강의를 서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에 많은 희생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국민대학교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전시하(戰時下)라는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배움을 향한 젊은이들의 정열은 식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국민대학교 역사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김동명(정치외교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0-21
사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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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사이버역사관 원문: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1946_1958/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