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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80장면 056

국민대신문이 걸어온 60년의 역사

요약

창성동 시절 ‘국민대학보’로 출발하다

1982년 우리학교 전경
1982년 우리학교 전경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창성동 시절 ‘국민대학보’로 출발하다

올해로 ‘국민대신문’이 창간 6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제호도 여러 차례 바뀌고, 중간에 폐간과 재창간 등 적지 않은 굴곡과 변화가 따랐지만, ‘국민대신문’의 60년 자취는 곧 국민대학교의 역사로서, 산증인으로서 숨결을 함께 해왔다.

‘국민대신문’의 전신인 ‘국민대학보’가 처음 발행된 것은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그러니 개교한지 2년이 넘을 무렵이었다. 1946년 9월 1일 내수동의 보인상업학교 건물을 빌어 ‘국민대학관’으로 출발한 본교는 교사(校舍)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2월에 들어서야 창성동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면서, 국민대학 학우회가 주도하여 ‘국민대학보’를 발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설립이 추진되었던 본교이건만, 미군정의 탄압과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건학 초창기 혹심한 시련과 수난을 겪어야 했다. 또한 부실 재단의 외면으로, 창성동 교사 신축조차 학생들이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해결하는 등 학교 건설을 개척해가던 때였다.

학보 발간에는 당시 학생회장 김진호를 비롯하여 남덕우·김익영 등 7명이 앞장 섰으며, 다른 대학에 비교하여 손색없는 학보를 창간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정열을 불태워 나갔다. 이들이 학보 창간에 들어간 것은 9월이었으나, 학교 측의 예산 지원도 없고, 지도해 줄 교수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편집·제작에 들어갔다. 이들은 학교 근처에 두 평짜리 방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업이 끝난 후 늦게서야 창간호 작업에 매달렸다. 편집과 인쇄는 서울신문사에 의뢰하였고 6, 7차례의 거듭된 교열 및 교정을 거쳐 3개월 뒤에 비로소 1948년 12월 18일 창간호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학보 창간사를 통해 “국민대의 자화상을 영출(映出)하고 순정(純正)한 학풍(學風)을 건립”한다는 목적을 표명하였다. 당시 ‘국민대학보’는 오늘날과 같이 격주간이 아니라, 월간(月刊)으로 발행되었다. 8면으로 편집된 창간호는 시사 보도보다는 학술적 성격이 짙은 학예지에 가까웠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논문을 소개하는데 비중을 두었던 때문이었다. 박일경 선생의 ‘헌법’, 이해종 선생의 ‘경제원론’ 등의 학술적 글과 함께 문화면에는 소설·시·수필 등을 공모하여 게재하였다. 학보는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교수들도 원고료를 일체 사양하면서 원고 투고를 통해 학보 발간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학생들만의 힘으로 발간되던 ‘국민대학보’는 3호까지 간행되다가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편집에서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를 학생들이 부담해야 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재단의 안정과 함께 거듭 태어나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가 있던 본교가 1953년 9월 서울로 돌아온 뒤 1955년 6월 25일 학보를 재발간했으나 이 역시 세 번의 발행 후 중단되었다. 창학 초기부터 재단 분규에 휘말렸던 본교는 10여 년 이상을 재단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때 폐교 위기까지로 내몰렸던 일도 있었다. 1958년 막바지에 처한 본교는 새로운 재단 물색에 나섰고, 성곡(省谷) 김성곤 선생이 본교를 인수하면서 안정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럴 무렵인 1959년 7월 1일 본교의 학보도 ‘국민대월보’로 명칭을 바꾸어 재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간교수제가 도입되면서 이종상 교수가 첫 주간을 맡았다. 또한 초창기의 학예지 성격에서 벗어나 시대의 ‘눈과 입, 귀’로서의 언론지로 변신해 갔다. 1960년 4·19혁명은 대학지성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를 각성시키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대학신문도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선도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4·19혁명을 통한 민주화의 염원과 군사쿠데타, 독재가 뒤얽히면서 한국 사회가 또다시 격랑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 격동기에서 대학신문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지성을 사회에 격렬하게 토해내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그것이었다. 본교의 대학신문도 기꺼이 민주화의 물결에 앞장 서 나갔다. 그리고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62년 5월 20일 ‘국민대월보’를 ‘국민대학보’로 개제하고 기존의 월보를 격주간으로 발행하면서 대학신문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였다.

북악캠퍼스 시대를 열면서 비약하다

창성동 캠퍼스가 협소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 새 부지를 물색하던 본교는 1971년 가을에 현재의 정릉동 캠퍼스로 옮겨왔다. 정릉시대를 열면서 본교는 발전의 웅지를 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학 언론도 다양화되면서, ‘국민대학보’ 외에도 1973년 방송국이 발족하였고, 1975년에는 영문신문 ‘The Kookmin Times’를 창간하였다. ‘국민대학보’ 역시 격주간지에서 주간지로 개편하고, 면수를 늘리며 대학신문의 역할을 증대해 나갔다.

주목할 것은 본교의 신문이 어느 대학보다 자율적으로 신문의 전 제작과정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국민대학보’는 오직 학생들의 손으로 그것도 가장 아마추어적인 학생으로 이뤄진 학생기자단에 의해 편집, 제작되었다. 그렇지만 신문 본연의 사명을 지켜나가는데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었다. 오히려 신문에 대한 애착은 여느 프로 못지 않았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신문제작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민대학보’의 남다른 전통과 역사가 쌓여질 수 있었다. 이제 60년의 세월이 쌓이면서, 신문사 주간을 거친 교수가 1959년 이종상 교수 이래 현재 손영준 주간 교수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에 이르고, 신문사를 거쳐 간 학생기자들도 5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 기자들 모임인 ‘필밭’은 선후배 간을 이어주는 교량이 되면서 학보사의 오래된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국민대신문사는 신문 발간 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하면서 대학문화를 선도해 갔다. 1976년 이래 매년 국민문학상(國民文學賞)을 제정하여 운영하다가 1979년 제4회부터는 북악문화상(北岳文化賞)으로 바꾸어 문학·학술분야에 걸친 현상공모를 통해 대학문화의 창달에 크게 기여해 왔다.

민주화 물결에 앞장 서다

1980년대 폭압적인 신공안 정국은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국민의 함성을 외면한 채 한국 사회를 암흑으로 몰고 갔다. 당시 민주화의 염원은 대학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고, 그 중심에 대학신문이 위치하면서 민주주의 수호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이때 ‘국민대학보’는 12면으로 증면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갔으며, 전국적 명성을 얻으며 전국 10대 대학신문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던 국민대학교 학생지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학신문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자칫 한 편에 쏠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학신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이무렵 국민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이래 질적·양적 발전을 거듭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1988년 11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교수·직원·학생 등 모든 북악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가로·세로 혼용방식에서 벗어나 전면 가로쓰기로 편집체계를 개편하는 한편 기사 내용도 국민대 구성원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시키는데 힘을 기울여 나갔다. 또한 대외적으로 국민대학교를 알리는 홍보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해 갔다.

국민대 발자취를 집대성한 ‘국민대학보(축쇄판)’을 펴내다

국민대 신문 60년사에서 기념비적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민대학보(축쇄판)’ 8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은 당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이 그렇고, 근현대 신문들이 역사자료로 활용되듯이, 국민대 신문은 곧 국민대 역사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자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대 신문사는 1991년 당시 학보사 주간인 박종기(국사) 교수의 발의에 의해 1991년부터 2006년에 이르기까지 15년에 걸쳐 창간이래 발행된 국민대 신문을 총집대성하여 축쇄판 8권을 간행한 것이다. 대학신문의 축쇄판 발간은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다른 대학은 엄두도 못낼 때, 축쇄판을 발간한 것은 높은 문화의식에서 발현한 국민대신문사의 업적이자 국민대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국민대 신문방송사’로 거듭나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국민대신문사는 국민인 모두를 위한 정보와 토론과 문화의 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UI선포와 함께 본교가 세계적 웅비를 선포하면서 보다 웅대한 구도에서 발전을 모색할 때, 신문사도 이에 발맞추어 나갔다. 우선 국민대학교의 언론 통합이 단행되었다. 2002년 11월 언론기관으로서 건전한 대학 언론의 정립 및 학풍 조성과 대학 문화 창달, 대학 발전을 위한 홍보 등에 기여하기 위해 국민대신문사, The Kookmin Review, 국민대방송국 등을 통합하여 ‘국민대 신문방송사’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직제 변경을 통해 2003년 3월부터는 ‘국민대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며, 언론의 전문성을 강화해 갔다. 정확·공정·창의를 사시(社是)의 바탕으로 삼은 ‘국민대신문’은 본교 공동체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대외홍보, 바람직한 대학문화의 창달을 통해 미래 발전상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대신문은 교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3년 4월부터 12월까지 국민대 녹색캠퍼스 캠페인을 벌여 그 일환으로 차 없는 녹색캠퍼스를 실현시켰으며, ‘움직이는 가게’를 운영하여 ‘아름다운 가게’ 캠퍼스 1호 국민대점을 여는 등 활동 반경을 더욱 넓혀 나가고 있다.

국민인 모두에게 사랑스런 ‘국민대신문’이 되기를 바라며

21세기 다양한 정보화시대를 맞이해 신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독자들이 계몽적 역할, 사실 보도, 여론 수렴을 넘어 생활 정보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임무까지 부여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경쟁력 시대에서 본교 발전을 위한 차원에서도 신문의 역할 또한 강조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요청을 ‘국민대신문’은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주된 독자인 본교 구성원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독자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신문이 간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끔 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 길을 추구해 갈 때 ‘국민대신문’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이라 믿는다.

흔히 얘기하듯이,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기능과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을 배제한 저널리즘, 저널리즘을 외면한 아카데미즘을 늘 견제하면서 평형 감각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대학신문이 존재하는 한 불변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시사성, 시대를 꿰뚫는 통찰성을 함께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고 또 여론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70주년, 나아가 100주년을 맞이할 때, 60주년을 기점으로 국민대신문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장석흥(국사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8-11-24

사료 사진

우리학교의 역사가 수록돼 있는 국민대신문 축쇄판
우리학교의 역사가 수록돼 있는 국민대신문 축쇄판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1991.12.19 국민대학보 축쇄판 발간 기념회
1991.12.19 국민대학보 축쇄판 발간 기념회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서장흥(국사) 교수
서장흥(국사) 교수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기록 사진 세부 컷 5/7
기록 사진 세부 컷 5/7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기록 사진 세부 컷 6/7
기록 사진 세부 컷 6/7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기록 사진 세부 컷 7/7
기록 사진 세부 컷 7/7출처 https://kmuhistory.kookmin.ac.kr/history/2004_now/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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